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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연상호, 2016): 불편한 공포, 그리고 남겨진 희망 1.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 종말, 숨막히는 초반 전개     영화 [부산행]은 평범한 출근 풍경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버려진 도로 위에서 수상쩍은 사고가 벌어지면서 불길한 징후를 암시합니다. 주인공 석우(공유)와 어린 딸 수안(김수안)은 생일을 맞아 부산으로 떠나는 KTX에 오르지만, 열차 출발과 동시에 어긋난 재앙이 시작되죠.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승객 한 명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순식간에 ‘좀비’로 변해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염을 퍼뜨립니다. 좁고 폐쇄된 객실 안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확산되는 감염 사태는 긴장감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고, 관객은 열차와 함께 미지의 지옥으로 달려가는 기묘한 공포를 체감하게 됩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과정에서 사운드와 카메라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제어해, 오히려 .. 2025. 4. 9.
시 (2010, 이창동): 죽음과 상처를 품은 세상에 피어난 작고 고운 언어 1.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기로 결심하다    영화 [시]는 시골 마을에서 손녀를 돌보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미자(윤정희)의 일상을 조명하며 시작됩니다. 그녀는 어느 날 취미 교실에서 ‘시 쓰기’ 강의를 접하고, 그때까지 잊고 지냈던 아름다움과 언어의 힘에 매료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지만, 사람들과 달리 사소한 일상 속 순간을 곱씹고, 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동시에 손녀가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져, 미자는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불편함과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詩)에 몰입함으로.. 2025. 4. 9.
버닝 (2018, 이창동): 청춘의 공허와 불안을 태우는 은유의 불길 1.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에서 시작된 미스터리, 이창동식 재해석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창동 감독 특유의 깊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탄생한 작품입니다. 원작이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와 ‘태우기’라는 상징적 행동을 바탕으로, 이창동은 한국적 현실을 담은 서사를 풀어냈습니다. 주인공 종수(유아인)가 오랜만에 만난 해미(전종서)와, 그녀의 친구이자 정체가 모호한 인물 벤(스티븐 연) 사이에서 느끼는 미묘한 긴장감은, 처음에는 하릴없이 흘러가는 듯 보이다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의심과 불안으로 치닫습니다. 무라카미 원작에서는 ‘헛간을 태운다’는 상징이 인물들의 내면 공허를 암시했다면, [버닝]에서는 그 행위가 한국 청년들의 답답한 삶과 만나면서 더욱.. 2025. 4. 9.
김지운 영화세계: 감각적 스타일과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서사 1. 영상미로 승부하는 감독, 시각적 디테일의 힘    김지운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들이 존재합니다. [장화, 홍련]에서 한옥과 전통 의상을 활용해 고전적 분위기를 극대화하거나, [밀정]에서 1920년대 경성의 골목과 기차 안을 세밀히 재현해낸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공간과 색감, 조명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연출하는 점이 그만의 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명 하나가 바뀌는 순간, 캐릭터의 심리 상태가 묵묵히 드러나고, 배경 곳곳에 배치된 소품은 관객들에게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각적 디테일은 김지운 감독 영화가 단순한 장르영화를 넘어서, 미학적인 완성도까지 갖추게 만드는 중요한 축이 됩니다. 그 결과, 작품이 끝난 뒤에도.. 2025.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