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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010, 이창동): 죽음과 상처를 품은 세상에 피어난 작고 고운 언어

by 주름만 생겼냐, 서사도 늘었지 2025. 4. 9.

1.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기로 결심하다  

  영화 [시]는 시골 마을에서 손녀를 돌보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미자(윤정희)의 일상을 조명하며 시작됩니다. 그녀는 어느 날 취미 교실에서 ‘시 쓰기’ 강의를 접하고, 그때까지 잊고 지냈던 아름다움과 언어의 힘에 매료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지만, 사람들과 달리 사소한 일상 속 순간을 곱씹고, 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동시에 손녀가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져, 미자는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불편함과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詩)에 몰입함으로써 막연한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창동 감독은 시 쓰기가 ‘유희’가 아닌 ‘현실 도피’도 아닌, 고단한 삶에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진지한 노력이자 선택임을 조용히 설파합니다.


2. 병으로 인한 망각과 도덕적 책임 사이의 갈등  

  미자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앓고 있어 일상에서 작은 일도 쉽게 잊어버리고, 심지어 단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반면, 손녀와 친구들이 저지른 사건은 미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안기고, 도덕적 책임감도 함께 짓누르죠. 이중적인 부담을 안고 있는 그녀가 시를 쓰기 위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간절하고 아프게 다가옵니다. 나무 한 그루, 강물에 비치는 햇살 같은 사소한 존재조차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기억과 흩어지는 단어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건져 올려야 할 대상이 되는 셈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소재를 통해, 망각이 주는 안락함과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교차시키며 인간 내면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특히 미자가 피해자 가족을 대할 때마다, 그리고 손녀를 바라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단어들이 오히려 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관객에게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죄의식과 슬픔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3. 노랫말 같은 결말, 삶을 계속하게 하는 시의 힘  

  영화는 평온해 보이는 시골 풍경 뒤에 감춰진 비극적인 사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삶을 이어가려는 미자의 결심을 동시에 그려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는 그녀가 완성한 시를 통해 세상과 자신에게 조용한 고백을 전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됩니다. 구체적 설명 없이도, 그 시가 어떤 의미를 띠고, 또 미자가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는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라는 언어가 감추어진 진실을 대면하도록 용기를 주었고, 무거운 현실을 잔잔히 보듬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창동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도 날카로운 시선은,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세상에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을 찾아내는 과정을 시인(詩人)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쉽게 잊히는 것”이 바로 시적 감수성이 아닐까 하는 감독의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