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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추천13

부산행 (연상호, 2016): 불편한 공포, 그리고 남겨진 희망 1.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 종말, 숨막히는 초반 전개     영화 [부산행]은 평범한 출근 풍경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버려진 도로 위에서 수상쩍은 사고가 벌어지면서 불길한 징후를 암시합니다. 주인공 석우(공유)와 어린 딸 수안(김수안)은 생일을 맞아 부산으로 떠나는 KTX에 오르지만, 열차 출발과 동시에 어긋난 재앙이 시작되죠.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승객 한 명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순식간에 ‘좀비’로 변해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염을 퍼뜨립니다. 좁고 폐쇄된 객실 안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확산되는 감염 사태는 긴장감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고, 관객은 열차와 함께 미지의 지옥으로 달려가는 기묘한 공포를 체감하게 됩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과정에서 사운드와 카메라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제어해, 오히려 .. 2025. 4. 9.
시 (2010, 이창동): 죽음과 상처를 품은 세상에 피어난 작고 고운 언어 1.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기로 결심하다    영화 [시]는 시골 마을에서 손녀를 돌보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미자(윤정희)의 일상을 조명하며 시작됩니다. 그녀는 어느 날 취미 교실에서 ‘시 쓰기’ 강의를 접하고, 그때까지 잊고 지냈던 아름다움과 언어의 힘에 매료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지만, 사람들과 달리 사소한 일상 속 순간을 곱씹고, 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동시에 손녀가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져, 미자는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불편함과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詩)에 몰입함으로.. 2025. 4. 9.
버닝 (2018, 이창동): 청춘의 공허와 불안을 태우는 은유의 불길 1.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에서 시작된 미스터리, 이창동식 재해석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창동 감독 특유의 깊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탄생한 작품입니다. 원작이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와 ‘태우기’라는 상징적 행동을 바탕으로, 이창동은 한국적 현실을 담은 서사를 풀어냈습니다. 주인공 종수(유아인)가 오랜만에 만난 해미(전종서)와, 그녀의 친구이자 정체가 모호한 인물 벤(스티븐 연) 사이에서 느끼는 미묘한 긴장감은, 처음에는 하릴없이 흘러가는 듯 보이다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의심과 불안으로 치닫습니다. 무라카미 원작에서는 ‘헛간을 태운다’는 상징이 인물들의 내면 공허를 암시했다면, [버닝]에서는 그 행위가 한국 청년들의 답답한 삶과 만나면서 더욱.. 2025. 4. 9.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김지운): 서부극의 껍데기를 벗긴 한국형 블록버스터 1. 만주의 모래바람 속으로 뛰어든 세 사내, 신나는 대결 구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여, 한 장의 보물 지도를 두고 얽히고설킨 세 남자의 치열한 추격전을 그립니다. 정우성이 맡은 ‘좋은 놈(박도원)’은 정의롭고도 능숙한 총잡이로, 박력 넘치는 말탄 액션으로 화면을 압도합니다. 반면 이병헌의 ‘나쁜 놈(박창이)’은 냉혹한 카리스마와 화려한 총솜씨를 자랑하며, 매 장면마다 극의 긴장감을 치솟게 만듭니다. 그리고 송강호의 ‘이상한 놈(윤태구)’은 능글맞은 말투와 돌발 행동으로 사건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동시에, 관객에게 가장 큰 웃음을 선사하죠. 만주의 황량한 모래바람 속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대립 구도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틀을 빌려오면서도 한국 특유.. 2025. 4. 7.
장화, 홍련 (2003, 김지운): 한국 호러영화의 우아한 공포 1. 고전 설화의 재해석, 장화홍련전에서 영감을 얻다     [장화, 홍련]은 김지운 감독이 우리 전통 설화 ‘장화홍련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개봉 당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원작이 가진 비극적인 가족 서사를 바탕으로, 영화는 새로운 캐릭터와 섬세한 감각을 덧입혀 더욱 신비롭고 서늘한 공포를 만들어 냅니다. 초자연적 요소나 귀신이 등장하는 전통적 호러 문법을 따르면서도, 내면 트라우마와 가족 간의 갈등을 심리적으로 풀어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불필요한 잔혹 장면 대신, 한옥 특유의 구조와 소품들을 활용해 관객이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문이 살짝 열리고, 마루가 삐걱이며, 복도를 비추는 어둑한 조명이 등장인물들의 불안과 죄책감을 은밀히.. 2025. 4. 6.
나홍진: 강렬한 리얼리티로 빚어낸 한국 스릴러의 새 지평 1. 데뷔작 [추격자], 몰입감과 현실감의 충격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2008) 한 편으로 한국 스릴러 장르에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전직 형사였던 엄중호(김윤석)와 연쇄 살인마 지영민(하정우) 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다루며, 당시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극도로 현실적인 범죄 스릴러를 선보였습니다. 좁은 골목을 휘감는 카메라 움직임과 핏빛으로 물드는 처참한 장면들은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을 조성했고,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생생한 리얼리티를 통해 관객의 공포를 극대화했습니다. 더욱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시스템의 무능과 부조리, 그리고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말의 인간성은, 이 작품이 단순한 범죄 영화를 넘어 사회적 성찰까지 담아내고 있음을 시사.. 2025.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