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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7

시 (2010, 이창동): 죽음과 상처를 품은 세상에 피어난 작고 고운 언어 1.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기로 결심하다    영화 [시]는 시골 마을에서 손녀를 돌보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미자(윤정희)의 일상을 조명하며 시작됩니다. 그녀는 어느 날 취미 교실에서 ‘시 쓰기’ 강의를 접하고, 그때까지 잊고 지냈던 아름다움과 언어의 힘에 매료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지만, 사람들과 달리 사소한 일상 속 순간을 곱씹고, 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동시에 손녀가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져, 미자는 손녀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불편함과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詩)에 몰입함으로.. 2025. 4. 9.
박찬욱 감독: 전 세계가 주목한 K-시네마의 선구자 1. 올드보이로 폭발한 신드롬, 한국영화 위상을 높이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 (2003)를 통해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한국영화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잔혹하고도 파격적인 복수 서사 뒤편에 숨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욕망과 죄책감을 정교하게 포착해낸 점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롱테이크로 진행된 복도 액션씬과 충격적인 반전을 담은 결말은, 작품 전체가 지닌 독창적인 스타일을 극명히 드러냈습니다. 폭력성과 미학, 그리고 블랙코미디적 유머가 공존하는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을 일약 세계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로 이끌었으며, 이를 계기로 ‘K-시네마’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관객뿐 아니라 해외 평.. 2025. 4. 2.
박쥐 (2009, 박찬욱): 뱀파이어 서사에 녹여낸 욕망과 죄책감의 미학 1. 병원 봉사에서 피를 나누는 존재로, 파격적 변신의 서막    영화 [박쥐]는 기존 한국 영화에서 흔히 다루지 않았던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성직자라는 독특한 설정과 결합함으로써 강렬한 첫인상을 남깁니다. 주인공 상현(송강호)은 인류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위험한 백신 실험에 자원하지만, 그 결과 예상치 못한 능력—즉, 뱀파이어가 되어버립니다. 병원 봉사를 하던 성실한 신부에서 피를 갈망하는 초자연적 존재로 탈바꿈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신앙과 인간성의 경계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특히 상현이 피를 나누게 되는 여러 장면들은, 단순한 공포나 혐오감을 조성하기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의 애틋함과 고뇌를 한층 더 부각시키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파격적 소재를 다루면.. 2025. 4. 1.
올드보이 (2003, 박찬욱): 복수의 끝에서 발견한 인간의 본성 1. 뜻밖의 감금, 압축된 시간 속 파헤쳐지는 과거    영화 [올드보이]는 어느 비 오는 밤, 평범한 가장 오대수(최민식)가 갑작스레 납치되어 15년 동안 감금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문을 엽니다. 그가 갇힌 밀실은 호텔방처럼 꾸며져 있지만, 창문도 없고 바깥 세상과의 소통도 완전히 차단된 공간입니다. 오대수는 감금된 이유도 모른 채 TV 뉴스와 간단한 식사만이 주어지는 날들을 보내며, 점차 복수심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이 긴 시간 동안 축적된 분노와 고통은 그가 탈출에 성공한 뒤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만큼이나 오대수를 더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을 가둔 상대가 이미 복수극의 판을 치밀하게 깔아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필 나를, 그리고 왜 15년이라는 시간.. 2025. 3. 30.
아가씨 (2016, 박찬욱): 관능과 긴장, 금기를 넘나드는 심리 게임 1. 핑거스미스 원작의 재해석, 1930년대 조선으로 옮겨오다    영화 [아가씨]는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하되, 무대를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옮김으로써 새로운 분위기를 구현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미 [올드보이]와 [박쥐] 등을 통해 강렬한 영상미와 파격적인 서사를 보여준 바 있지만, [아가씨]에서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기묘하게 뒤섞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층 더 세련되고 섬세한 연출을 선보입니다. 고풍스러운 저택과 하녀복, 기모노와 서양복이 공존하는 무대 설정은 원작의 빅토리아 시대적 색채를 대체하면서도, 일제강점기의 이질적인 풍경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배경 설정에서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이국적 매력은, 나중에 펼쳐질 치밀한.. 2025. 3. 29.
봉준호, 현실과 장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예술가 1. 초기작의 매력: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보여준 가능성     봉준호 감독은 2003년, [살인의 추억]을 통해 한국 영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 연쇄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지방 소도시 형사들의 허술해 보이지만 집요한 수사 과정을 사실적이고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당시 국내 스릴러 장르가 고착화된 공식을 따르던 시기에, 봉준호 감독은 범죄와 사회적 문제를 결합함으로써 단순한 수사극을 넘어서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코미디와 서스펜스를 교묘히 배치해 관객에게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하는 방식은 이후 그의 대표적 연출 기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뒤이어 2006년 발표한 [괴물]은 한국형 괴수영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가족애와 사회 풍자를 독특하게 .. 2025. 3. 28.